1960년대 초 교토. 한 택시 회사가 연료를 넣으러 주유소에 갔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사장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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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사는 주유소를 직접 지었습니다. MK석유가 그렇게 생겼습니다.

이게 MK택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업계 전체가 등을 돌렸다

MK택시 창업자는 유봉식, 일본명 아오키 사다오입니다.

재일 한국인이었던 그는 교토에서 택시 사업을 시작했는데, 기존 업계의 반응은 거부였습니다.

단순한 경쟁 배제가 아니었습니다. 연료 공급 자체를 막는, 물리적인 차단이었습니다.

a person standing next to a yellow car

1980년대 초에는 더 직접적인 보이콧이 있었습니다. MK택시가 업계 공통의 요금 인상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요금 동결을 선언하자, 교토 지역 사업자들이 조직적으로 주유 거부를 단행했습니다.

임금 소송 과정에서는 창업자의 출신을 겨냥해 '특정 국가 출신의 인간이 업계를 주도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는 식의 발언도 나왔습니다.

업계가 이렇게까지 반응했던 건, MK택시가 흔들기 어려운 구조를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지역, 같은 요금'이 법이었다

당시 일본 택시 시장은 정부가 지역별로 동일 요금을 강제하는 구조였습니다.

어느 회사 택시를 타도 요금이 같았고, 그 요금은 국가가 정했습니다.
미터기 하나, 요금표 하나.

서비스 경쟁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시장이었습니다.

A sign with the word Service in black letters on a white background

MK택시는 여기에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경영 합리화를 통해 원가를 낮추고, 정부가 정한 요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영업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정부가 막았습니다. MK택시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요금을 낮추겠다는 회사와, 낮추지 말라는 국가 사이의 싸움이 수십 년간 이어졌습니다.

1985년 오사카 지법은 국가의 요금 인하 신청 기각이 부당하다며 MK택시 손을 들어줬습니다. 일본 최초의 운임 인하 인가로 이어진 판결이었습니다.

1989년 제2심에서는 운수성이 MK택시의 경영 노력을 공식 평가하며 화해가 성립됐습니다. 국가가 민간 기업의 자율적 요금 결정권을 일부 인정한 첫 사례였습니다.

2016년에는 국토교통성이 '1일 250km 제한'이라는 최고 승무 거리 규제를 MK택시에 적용했다가 패소했습니다. 법원이 "제한 수치의 산출 근거가 불투명하다"고 판결했고, 일본 최고재판소가 정부 상고를 불수리하면서 규제는 사실상 철폐됐습니다.

250km

정부가 설정한 '1일 최고 승무 거리' 제한. 법원은 이 수치의 근거가 불투명하다고 판결했습니다.

기사가 말을 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그 시절 교토·오사카 일반 택시에서 기사가 승객에게 먼저 인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표준이었습니다.

MK택시는 이것도 바꿨습니다. '아리가또 운동'을 전개하며 네 가지 필수 인사를 하지 않으면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공항과 도심을 잇는 구간에 정액 요금제를 도입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당시 업계는 미터기에 의한 구간 요금제만을 고수했으니, 미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공항 전용 승합 택시 '스카이게이트 셔틀'을 국내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2001년에는 업계 최초로 GPS 배차 시스템을 전면 도입했습니다.

무전기로 배차하던 경쟁사들과의 격차는 그렇게 벌어졌습니다.

기사를 뽑는 방식부터 달랐다

일반적인 일본 택시 회사는 운전 경력자를 선호했습니다. MK택시는 반대였습니다.

신입 기사의 99.9%를 미경험자로 채용했습니다. 경력보다 서비스 마인드를 먼저 본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채용 후에는 약 14일 이상의 접객 실기 교육이 의무였습니다. 휠체어 대응 같은 교통 바리어 프리 교육도 포함됐습니다.

수습 기간 1개월 동안에는 실적 압박 없이 약 28만 엔의 고정 급여를 보장했습니다. 실적에 쫓겨 교육이 부실해지는 일반적인 구조와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대졸 기사를 채용해 하이엔드 서비스를 전담시키는 '학사 하이어' 제도, 기사를 영국으로 보내는 해외 연수 제도도 운용했습니다.

관광 기사가 유적지를 직접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의 교토 관련 전문 지식 교육, 사내 심사를 통과한 기사에게만 부여하는 중국어·영어 관광 기사 자격도 있었습니다.

99.9%

MK택시 신입 기사 중 운전 미경험자 채용 비율

차별의 기억이 서비스가 됐다

창업자가 겪은 배제는 회사 안에 다른 방식으로 남았습니다.

유봉식이 받았던 민족적 멸시와 업계의 따돌림은 인권 교육의 토대가 됐습니다. 외부의 차별이 내부의 기준을 만든 셈입니다.

MK택시는 전 차량에 청각 장애인용 '귀 마크' 카드를 비치하고, 장애인 전용 귀빈 송영 매뉴얼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휠체어 대응 차량은 38대 이상 도입됐습니다.

2016년 G7 이세시마 서밋, 2019년 G20 오사카 서밋에서 각국 요인 이동을 수탁한 회사가 됐습니다.

주유소를 거부당했던 그 회사가 국가 의전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간 겁니다.

교토 업계가 '업계의 이단아'라고 불렀던 MK택시는, 1993년 도로운송법 개정을 이끈 논거가 됐습니다. 이후 일본 정부가 택시 사업을 면허제에서 허가제로 완화하는 과정에서도 핵심 사례로 거론됐습니다.

연료를 거부당한 회사가 업계 규제를 바꿨습니다.

수십 년간 국가와 업계 양쪽을 상대로 싸웠고, 대부분은 이겼습니다. 다만 노사 분쟁과 민족적 비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깔끔한 승리가 아니라, 마찰의 연속이었습니다.

MK택시가 처음부터 싸우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 회사를 계속 앞으로 밀어냈고, 그 흔적이 MK석유라는 이름으로, 배려 서비스의 매뉴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