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를 보다보면 한번쯤 악당이 수백만 달러 비자금을 숨긴 스위스 번호 계좌를 대는 장면,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man in blue jacket walking on sidewalk during daytime

그 '절대 비밀'이, 이미 꽤 오래전에 깨졌습니다.

비밀보호가 범죄였던 시절

스위스가 은행 비밀 유지를 법으로 못 박은 건 1934년입니다.⁠​​‌‌​​‌​‍​​‌‌​​​​‍​​‌‌​‌​​‍​​‌‌‌​​‌‍​​‌‌‌​​‌‍​‌‌​​​‌​‍​​‌‌​‌‌​‍​​‌‌​​​‌‍​​‌​‌‌​‌‍​‌‌​​​‌‌‍​‌‌​​‌​​‍​‌‌​​‌‌​‍​‌‌​​‌​​‍​​‌​‌‌​‌‍​​‌‌​‌​​‍​‌‌​​​‌‌‍​​‌‌​​‌‌‍​​‌‌‌​​‌‍​​‌​‌‌​‌‍​‌‌​​​‌​‍​​‌‌​‌‌‌‍​​‌‌​‌‌‌‍​​‌‌​‌​‌‍​​‌​‌‌​‌‍​​‌‌​​​​‍​​‌‌​‌‌​‍​​‌‌​‌‌‌‍​‌‌​​​‌​‍​​‌‌​​‌‌‍​​‌‌​​‌​‍​‌‌​​​‌‌‍​​‌‌‌​​‌‍​‌‌​​‌​‌‍​​‌‌​​​‌‍​​‌‌​‌​‌‍​​‌‌​‌​​⁠

그해 제정된 스위스 연방은행법(Swiss Federal Banking Act)은 고객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는 행위 자체를 범죄로 규정했습니다. 은행원이 고객 계좌 정보를 누군가에게 알려주면, 상대가 누구든 형사처벌 대상이었어요.

이 법이 생긴 배경에는 당시 유럽의 불안한 정세가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재산을 옮겨야 했던 유대인들이 스위스 은행에 자산을 맡겼고, 그 자산을 지켜주는 법적 장치가 필요했던 거죠.

비밀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비밀을 깨는 것이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리 깔끔하게 흐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자산과 수십 년간의 침묵

나치를 피해 스위스 은행에 자산을 맡긴 유대인 피해자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계좌 명의인이 홀로코스트로 사망했고, 유족들은 계좌 존재조차 증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비밀'이라는 원칙이 이번엔 피해자 가족에게 벽이 됐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대규모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 계좌를 전수 조사한 끝에, 458,400명 이상의 피해자에게 총 12억 8,700만 달러가 지급됐습니다.

비밀을 지킨다는 원칙 하나가, 피해자 구제를 수십 년 늦춘 셈이었습니다.

절대 비밀은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절대 비밀'이라는 말 자체가 실상과 맞지 않았습니다.⁠​​‌‌​​‌​‍​​‌‌​​​​‍​​‌‌​‌​​‍​​‌‌‌​​‌‍​​‌‌‌​​‌‍​‌‌​​​‌​‍​​‌‌​‌‌​‍​​‌‌​​​‌‍​​‌​‌‌​‌‍​‌‌​​​‌‌‍​‌‌​​‌​​‍​‌‌​​‌‌​‍​‌‌​​‌​​‍​​‌​‌‌​‌‍​​‌‌​‌​​‍​‌‌​​​‌‌‍​​‌‌​​‌‌‍​​‌‌‌​​‌‍​​‌​‌‌​‌‍​‌‌​​​‌​‍​​‌‌​‌‌‌‍​​‌‌​‌‌‌‍​​‌‌​‌​‌‍​​‌​‌‌​‌‍​​‌‌​​​​‍​​‌‌​‌‌​‍​​‌‌​‌‌‌‍​‌‌​​​‌​‍​​‌‌​​‌‌‍​​‌‌​​‌​‍​‌‌​​​‌‌‍​​‌‌‌​​‌‍​‌‌​​‌​‌‍​​‌‌​​​‌‍​​‌‌​‌​‌‍​​‌‌​‌​​⁠

1934년 법도 완전한 예외 없음을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고객 본인이 동의하면 정보 공개가 가능했고, 특정 범죄 수사에는 사법 공조도 이뤄졌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이미지는 법의 실제 내용보다 훨씬 부풀려진 것이었어요.

그리고 2015년, 그 이미지가 제도적으로도 무너졌습니다.

스위스가 털어놓기 시작한 해

스위스는 2015년, 자동정보교환(AEOI, Automatic Exchange of Information) 체제를 채택합니다.⁠​​‌‌​​‌​‍​​‌‌​​​​‍​​‌‌​‌​​‍​​‌‌‌​​‌‍​​‌‌‌​​‌‍​‌‌​​​‌​‍​​‌‌​‌‌​‍​​‌‌​​​‌‍​​‌​‌‌​‌‍​‌‌​​​‌‌‍​‌‌​​‌​​‍​‌‌​​‌‌​‍​‌‌​​‌​​‍​​‌​‌‌​‌‍​​‌‌​‌​​‍​‌‌​​​‌‌‍​​‌‌​​‌‌‍​​‌‌‌​​‌‍​​‌​‌‌​‌‍​‌‌​​​‌​‍​​‌‌​‌‌‌‍​​‌‌​‌‌‌‍​​‌‌​‌​‌‍​​‌​‌‌​‌‍​​‌‌​​​​‍​​‌‌​‌‌​‍​​‌‌​‌‌‌‍​‌‌​​​‌​‍​​‌‌​​‌‌‍​​‌‌​​‌​‍​‌‌​​​‌‌‍​​‌‌‌​​‌‍​‌‌​​‌​‌‍​​‌‌​​​‌‍​​‌‌​‌​‌‍​​‌‌​‌​​⁠

외국인 계좌 정보를 해당 국가 세무당국과 자동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2018년부터 실제 정보 공유가 시작됐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조세 회피 방지 압력과 OECD 주도의 AEOI 체제 확산이 스위스를 움직인 결과였습니다.

효과는 수치로 나타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스위스의 외국인 은행 예금은 2015년까지 약 30%, 2022년까지는 최대 85%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85%

2022년까지 스위스 외국인 은행 예금 감소 추정치(최대)⁠​​‌‌​​‌​‍​​‌‌​​​​‍​​‌‌​‌​​‍​​‌‌‌​​‌‍​​‌‌‌​​‌‍​‌‌​​​‌​‍​​‌‌​‌‌​‍​​‌‌​​​‌‍​​‌​‌‌​‌‍​‌‌​​​‌‌‍​‌‌​​‌​​‍​‌‌​​‌‌​‍​‌‌​​‌​​‍​​‌​‌‌​‌‍​​‌‌​‌​​‍​‌‌​​​‌‌‍​​‌‌​​‌‌‍​​‌‌‌​​‌‍​​‌​‌‌​‌‍​‌‌​​​‌​‍​​‌‌​‌‌‌‍​​‌‌​‌‌‌‍​​‌‌​‌​‌‍​​‌​‌‌​‌‍​​‌‌​​​​‍​​‌‌​‌‌​‍​​‌‌​‌‌‌‍​‌‌​​​‌​‍​​‌‌​​‌‌‍​​‌‌​​‌​‍​‌‌​​​‌‌‍​​‌‌‌​​‌‍​‌‌​​‌​‌‍​​‌‌​​​‌‍​​‌‌​‌​‌‍​​‌‌​‌​​⁠

자금은 움직였습니다. 다만 스위스 금융시장 자체가 흔들렸느냐 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2018년 제도 시행 전후로 스위스 은행들의 주가에는 눈에 띄는 하락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비밀이 사라졌어도, 스위스 은행이 굴러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지는 남고, 제도는 바뀌었다

스위스 비밀계좌라는 말은 여전히 강렬합니다.⁠​​‌‌​​‌​‍​​‌‌​​​​‍​​‌‌​‌​​‍​​‌‌‌​​‌‍​​‌‌‌​​‌‍​‌‌​​​‌​‍​​‌‌​‌‌​‍​​‌‌​​​‌‍​​‌​‌‌​‌‍​‌‌​​​‌‌‍​‌‌​​‌​​‍​‌‌​​‌‌​‍​‌‌​​‌​​‍​​‌​‌‌​‌‍​​‌‌​‌​​‍​‌‌​​​‌‌‍​​‌‌​​‌‌‍​​‌‌‌​​‌‍​​‌​‌‌​‌‍​‌‌​​​‌​‍​​‌‌​‌‌‌‍​​‌‌​‌‌‌‍​​‌‌​‌​‌‍​​‌​‌‌​‌‍​​‌‌​​​​‍​​‌‌​‌‌​‍​​‌‌​‌‌‌‍​‌‌​​​‌​‍​​‌‌​​‌‌‍​​‌‌​​‌​‍​‌‌​​​‌‌‍​​‌‌‌​​‌‍​‌‌​​‌​‌‍​​‌‌​​​‌‍​​‌‌​‌​‌‍​​‌‌​‌​​⁠

그 실체는 1934년부터 이미 '절대'가 아니었고, 2015년 이후로는 제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스위스 은행은 국제 투명성 기준에 맞춰 계좌 정보를 각국 세무당국과 나눕니다.

추정치로는 90년 넘게 쌓인 이미지와, 실제로 작동하는 제도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벌어져 있습니다. '비밀계좌'라는 단어는 살아남았지만, 그 단어가 가리키던 실제 제도는 이미 다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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